#20140401

공책 | 2014.04.02 02:06 | 조회 735




주된 관심사가 풍경과 건물이지 동물은 아닌 한 저명한 화가 친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최근작들에 대한 소박한 시사회를 베푸는 중이었다.

인적이 끊긴 농가 마당에 버려진 바퀴 몇 개와 부서진 펌프 하나가 있는 그림을 나는 흘끗 보았다. "우물 옆에다 여우 얼굴 하나를 숨겨두셨군." 내가 말했다.

친구가 벌떡 일어나 그의 캔버스를 응시했다. "아냐, 아냐." 그가 항의했다. "저건 여우가 아냐.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그거 놀랍네." 내가 말을 받았다. "내 눈에는 아직도 보여. 여기 말이야." 나는 애써 가리켰다. "보라고, 두 눈, 두 귀. 저기, 우물 꼭대기 바로 위에, 쳐다보고 있어."

"있을 리가 있나." 화가가 소리쳤다, 자기 그림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왔다갔다하기 시작하면서. "빌어먹을. 이봐, 그냥 녹슨 펌프와 판자, 그리고 낡은 철사가 다라고.

여우는 그려놓지 않았어. 안그렸어, 안그렸다고."

"상관없이 여우는 거기 있어, 댄. 그게 관점이라는 거지. 어쩌다보니 자네가 여우를 들였겠지. 아니면 여우가 슬금슬금 들어왔거나. 이쪽으로 와서 봐봐."

댄이 낯설게 나를 응시했다.

"안 보겠네." 그가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러면 나 자신도 여우가 보이기 시작할 테니까. 지금도 거의 보인다 싶은데. 보지 않겠어. 자넨 내 그림을 망치고 있어.

더 이상 보여주고 싶지 않네." 그린 쪽이 벽을 향하게끔 그가 자신의 작품들을 세워 쌓기 시작했다.

"댄, 미안하네. 난 그냥 봤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아마 눈 탓이겠지."

나는 안경을 벗어 흔들었다. "내 생각은 자네의 실제 의도가……"

"됐네." 그가 앵돌아졌다. 그는 결코 다시는 내게 그림을 개인적으로 보여주지 않을 것이었다.

206-207



왜냐하면 나는

사랑한다 내 자신의 형태 너머 형태들을

그리고 유감이다 우리 사이 경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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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낯선 시간들: 어떤 생의 발굴(All the Strange Hours: The Excavation of a life)

_로렌 아이슬리(Loren Eiseley) 지음, 김정환 옮김, 강, 2008.







로렌 아이슬리:: 1907-1977. 매우 존경받던 인류학자, 과학 작가, 생태학자, 그리고 시인. 산문집과 전기, 일반 과학서 등을 출간.

'숨겨진 산문'이라 불리는 시적인 산문체로 인간 진화 같은 복잡한 과학 사상을 일반 대중에게 설명. 인류와 자연세계의 바람직한

관계를 역설한 글로 유명하며 이것이 환경운동 발생에 일조.

저서 《광대한 여행(1957)》《다윈의 세기(1958)》《뜻밖의 우주(1969)》《밤의 나라(1971)》그리고 자서전《그 모든 낯선 시간들(1975)》외……

아이슬리는 벤저민 프랭클린 이후 가장 유명한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로 평가받으며 (훗날) 아내와 함께 묻힌 그의 묘비에는

그의 시집 《작은 보물들》에서 따온 구절, "우리는 대지를 사랑했으나 머물 수 없었다"가 새겨져 있다.

-옮긴이의 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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