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보프, 일상의 성사聖事

문우보인 | 2014.03.06 08:59 | 조회 158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사(聖事)가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었다. 반면에 옛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나도 그것을 이해하게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온갖 그리스도교 언어로- 성경의 시대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씌어진 것들을 다섯 해 동안 나날이 여러 시간씩 연구를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그야말로 정신의 씨름을 벌인 나머지 552쪽 짜리 책(학위논문)이 박혀 나오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것이 결코 으뜸가는 성과는 아니었다. 천신만고와 희노애락 끝에 내가 얻은 것인즉 벌써부터 이미 발견되어 있던 그것의 재발견이었다.- 나는 어떤 손에 붙잡히는 듯한 깨달음을 겪었다.

성사는 언제나 살아 있었고 누구나 겪으며 살아온 것이건만 나는 그것을 몰랐구나. 적어도 조금 밖에 몰랐구나. 진작부터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어 온 사물들의 풍경을 이제야 내 눈의 망막에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이 성사들로 가득 차 있다. 일상의 심층에 생생히 경험되는 진정한 성사들로 주어져 있다. 우리 가족이 물을 따라 마시는 잔, 어머니가 쑨 옥수수죽, 아버지가 남겨 놓으시어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마지막 담배 꽁초, 낡은 책상, 성탄절에 선물받은 굵직한 양초, 밥상 위의 꽃병, 한 줄기 산맥, 고향 마을의 자갈길, 어버이의 옛 집... 이런 모든 것이 이미 성사이며 그저 사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인간화되어 있다.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들의 목소리와 메시지를 듣고 있다. 이들은 내면의 생명과 마음이 있다. 성사들이 되어 있다. 다른 것들과는 구별되면서 그 안에 현존하는 실재를 간직하고 표현하고 회상시키고 보여주며 전해 준다.

 

흔히 현대인들은 성사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것들을 제대로 꿰뚫어보며 받아들이기에 필요한 만큼 열린 시력을 구사하지는 못하고 있다. 사물이 사물로서만, 외적으로만 관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에서부터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드높은 빛이 그 속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빛은 사물을 밝힌다. 투명하게, 투시할 수 있게 만든다.

                                         

                                           -레오나르도 보프 지음, 정한교 옮김 {聖事란 무엇인가}(분도,199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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